Sunday 27 November 2016

오해

사람은 얼마나 이해를 정확히 하나?
집의 화분에서 부추가 자란다.  물을 한 번도 주지 못했는데,  운도 좋아 잘 자랐다.  하얀 꽃도 활짝 피운 것을 보니 기특하다.  나는 구속하는 것을 싫어한다.  부추는 다른 사람이 심었다.  먹지도 않는다.  다음 봄에 더 많은 부추가 화분에서 저절로 자란다.  부추 씨앗을 따면서,  내가 이 부추 씨앗을 직접 만들려면 1,000년의 시간이면 만들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그러면서,  내가 이 세상에 오기 전,  나를 만들어 세상에 보낼 수 있었다면,  나는 나의 몸에 무엇을 심기 위해 노력했을까?  나를 만드는 일을 아마 중간에 포기하고 말았을 것 같다.  10,000년이라는 시간이 있었다면,  나 자신을 완성할 수 있었을까?  대충하고 말았을 것 같다.

어머니 틀니를 만든 지 6개월이 다 되어간다.  틀니를 순서대로 놓아두고 매일 이렇게 말을 한다.  '그대로 들어 그대로 끼우세요.'  도식으로 말하자면,  그대로 들어서 입 안으로 밀어넣으면 들어맞게 된다는 소리이다.  x축에서 그대로 수직 방향 상승한 다음,  y축으로 입 안 쪽으로 이동하는 그림이 그려진다.  그런데 어머니는 거의 매번 틀니를 거꾸로 넣는다.  잘못된 방법을 거의 바꾸지 못한다.  6개월이 다 되어가는 어느 날,  어머니와 꼭 같은 자세로 앉아서 틀니를 입 안에 넣는 시늉을 해보았다.  그대로 들어서 입 안에 넣는 순간,  틀니의 방향이 바뀌고 있었다.  안 쪽은 바깥쪽으로 가고, 아래는 위로 가고 있었다.

6개월 동안이나 같은 말을 반복하는 나는 상대방이 이해할 수 없는 말을 반복하고 있었다.

노인에 대한 기록은 꼭 필요하다.  젊었을 때는 종로서적에 자주 갔다.  교보문고보다 더 자주 간 이유는 종로서적 3층에서 싼 대학교재를 팔았던 때문이다.  지식은 필요하고 비싼 책을 살 수 없어서 생각해낸게 대학교재였다.  유명 대학의 모든 교재를 사서 볼 생각까지 하고 교재 명단까지 작성을 했다.  지금도 어딘가에 그 목록이 있다.  그 중에 보게된 게 '노인학'이다.  교재로는 너무나 엉성한 책이었다.  노인학이 꼭 필요한 이유는,  나도 빠른 속도로 노인화 되어가고 있고,  기억은 가물거리고, 화도 갈 수록 잘 내고,  속단은 늘어만 가고,  단정도 점점 더 잘하고 있다.  노인 일지도 필요하다.  노인을 보살피는 후대가 반드시 읽어야 하는 내용들이고 그들에 노후에도 필요한 지식이다.

이 교재들을 구하기 위해 어느 대학에 전화를 했다가 (아마, 이화여대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40대쯤 되는 직원인 듯한 사람에게 봉변 같은 것을 당한 적이 있다.  왜 대답을 그 모양으로 하지?  법률구조공단에 전화를 해보면 아주 불쾌해지는 그런 기분이 들었다.  그 때는 이름만 구조공단이었다.

인생은 답이 어디에도 없지만,  확실히 답이 있다.  그 것은 스스로 찾아내야 한다.  몇 달 씩 걸어 오체투지를 한다고 알 수 있는 내용은 아니다.  자기가 주관할 수 있는 순수한 자기의 세상을 만든 다음에 답을 얻을 수 있다.  남이 만들어놓은 길에서는 어떤 답도 들을 수 없다.  정확히 말하자면,  '행복'이라는 것도 인생의 목표가 아니다.  일상의 작은 행복이라면,  맛있는 것 사먹는 것,  취직이 되는 것, 승진하는 것, 금고를 터는데 성공하는 것,  이성을 꼬시는데 성공한 것..  어떤 것은 나쁘고 어떤 것은 좋은 것인가?  어떤 것은 행복의 카테고리에 넣고 어떤 것은 빼야 하는가?  사람마다 기준은 같지 않다.  정의감으로 판단하는가?  평화 개념으로 판단하는가?  질서로 판단하는가?  정직으로 판단하는가?  아무리 나쁜 짓을 한 뒤에 자신의 뇌를 마비시키면 되는가?  뇌를 기만하면 충분한가?  이 방법은 거의 모든 사람이 하고 있다.  자기 합리화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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