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dnesday 21 December 2016

물성 대기 (2)

언젠가 '물성 대기'를 설명하게 될 날이 올 지 모르겠다.
내가 살아있는 동안 이 내용을 정리 할 수 있을까?

이 것은 내가 처음 사용하는 말이다.
전공하지 않으면 용어에 어둡고, 전공하면 또 자유롭지 못하다.

모든 물성은 최고 속도로 운동한다.  그 것이 죽었든 살았든 전혀 상관이 없다.
오히려 이 물성을 정지 시키는 것과 같은 효과를 누리는 것은 생명이다.
중력을 거슬러 위로 날아오르는 날개 짓 같은 것이 좋은 예가 되겠다.
날개를 짓 없이도 물과 같은 것은 저절로 높이 올라갔다 다시 뭉쳐서 떨어지기를 영구적으로 반복한다.  가장 효과적인 재생산이다.
같은 효과로 이 생명 내부에서도 끊임 없는 운동이 이루어지고 있다.
또 이 생명 내부에서의 운동은 2중 운동이면서, 단독 운동이 아니다.
몸의 각 기관에 의해 행동은 하나의 목적을 갖는다.

생명은 행복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통증의 반대 방향 쯤에 그런 것이 존재하기는 하지만 꼭 그 방향으로 달려가는 것이 목적은 아니다.  무엇인가에 몰입하는 것은 동시에 자신의 생명의 그만큼의 시간을 죽이기에 동의한다는 것은 규약에 의하지 않고서도 서로 안다.  계속 반복하고 즐겁다고 해서 생명의 존재 이유가 되지는 않는다.  모든 행동에는 시간이 할당되어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결과는 언제나 0으로 수렵한다.  이 것이 생명의 본질이다.

빛은 에너지원을 밝히지 않고도 영구히 진행 운동을 한다.  모든 물성은 에너지원을 밝히지 않고 영속적인 운동을 한다.  세상은 또 우주는 자신을 어떤 생명체에게 설명할 의무를 갖지 않는다.  조금 보여줄 뿐이다.  그 것도 볼 수 있는 생명체에게,  그 것도 보려는 의지가 있는 생명체에게,  또 그 것도 기억하고 싶어하는 생명체에게..

물성 대기는 언제나 '운동'으로 관찰된다.



.......
슬픔은 나의 (아까워서 도저히 버릴 수 없는) 재산이 아니다.  불행을 느끼는 것도 인생의 의무가 아니다.  모든 것이 같은 방향으로 가고 있다면,  각 원소가 뜻하는 바가 다를 지라고 외부에서는 동질성으로 협응하고 있는 것으로 간주된다.

불행을 불행으로 느끼는 것은,  불행 비교 센서를 (아무나 건드릴 수 있게) 너무 낮은 곳에 두었기 때문이다.  느낀 다음에 행동할 것이 아니라,  행동한 다음에 느껴도 된다.  나면서부터 소지한 '두려움'은 존재를 충분히 '바보'로 만든다.  D.N.A.는 프로그램이지 생명체의 신앙이나 최종 목적은 아니다.

정신과 몸을 분리하지 못하면 미몽에서 벗어날 수 없다.  정신은 몸의 '충신'이 아니다.

로마 숫자 I, V, X는 건축 기술 중에서 '끌'로 표현하는 데서 발달한 것으로 보인다.
The Birth Of A Wooden House. Extended
https://www.youtube.com/watch?v=RV7pmE4MC-I
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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