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9 October 2016

회상

이 끄적거리는 짓을 멈추지 못하는 이유를 생각해보니,  내가 나에게 하는 말이었다.  유쾌한 작업은 아니지만, 그래야 시간은 또 가니까..

내가 태어났다.
기쁨과 슬픔으로 저울을 재보면 실패고 대패이다.
혹시나 하고 다음 버스를 기다려보는 세월이다.

나는 태어나는 순간 이런 생각을 했을 것이다.
와, 우리 집 부자다.
집 안에서 축소판 축구를 해도 될 만큼 마당이 컸다.
지금도 농촌에서 그렇게 큰 집을 볼 수 없다.
마루도 크고,  한 줄로 방도 많다.  부엌도 크고 부엌 옆에 따로 방도 있다.
그런데 그 부엌방에서 할아버지가 살았던 이유는 궁금하다.  호롱불을 켜기 위해 따른 석유냄새도 기억이 난다.  기억나지는 않지만,  집에 머슴이 있었다고 한다.
어떤 아저씨가 돼지를 잡으려고 쫓아다닌 걸 본 생각은 지금도 선명하다.

집 한 쪽은 깊게 패인 배수로,  뒤로는 논,  담을 경계로 한 집은 두 채였는데,  서로 교류도 없었고,  다 조용했다.  아, 오른 쪽 집은 내 친구가 있었다.  아무리 불러도 나오지 않았는데 오랜 세월 뒤에 죽었다는 소리는 들었다.  마당 앞 집 경계선엔 높은 담이 있었고, 그 가운데 돼지 우리가 있었는데,  두어 마리에 비교적 깨끗했다.  왼쪽에 아주 큰 창고가 있었는데 그 안엔 토끼 몇 마리가 있었다.  내가 가끔 들어가서 만져주면 가끔 죽기도 했다.  나중에 교과서에서 보고 그 이유를 알았다.  화장실 지금과는 다른 용도가 있어서 화장실은 아주 컸다.

나는 가족 역사를 잘 모른다.  질문을 해본 적도 없었고,  생각해보면,  썩 좋지는 않았을 것으로 생각한다.  역사가 누구의 것인 지가 중요한가?  구멍난 양말을 신고다녀도 이상할 것 없었던 때처럼, 다들 같이 겪은 사실들인데..

유실수라곤 집 오른 쪽에 감나무 하나.  농사 지역이라 그런 지 집 안에 채소도 심지 않았던 것 같다.

외가나 친가나 이상하게 다정한 감정들은 없었다.  할머니는 딸에게는 애정이 있었지만, 나머지 후손들에게는 특별한 감정이 없었다.  할아버지와 겸상하면, 조기 같은 생선이 올라오는데,  당시 다섯 살 쯤 되는 내 손 등을 치면서 할아버지 반찬에 손 못 대게하던 할머니가 생각난다.  중소도시로 이사를 와 그늘 밑에 채소를 심고,  양지에 오이를 심었다.  오이가 노란 꽃이 피면 손가락만한 열매가 생긴다.  나는 그 걸 따먹었다.  가족에 대한 배려도 없었다.  할머니가 집 밖에 있는 수동펌프로 물 뜨러 가다 부엌 문 턱 바로 앞에 쓰러져 일어나지 못한다.  나는 할머니 돌아가셨다고 외쳤다.

외가는 가난한 집안이다.  외할머니가 길 바닥에서 떡 파는 모습을 봤다.  얼굴을 마주하고도 반기지 않는다.  훗날 외삼촌 눈빛에서도 같은 느낌을 확인하게 된다.  먹을 게 없어 외삼촌들을 데리고 한 끼 식사를 해결하기 위해 그 먼 길을 자식들을 데리고 온 외할아버지.  이 곤란한 상황에 고통스러워한 어머니 경험담이다.

할아버지는 졸부이다.  정확한 것인 지 모르지만,  일제 때 쌀 수확량을 가늠해주고, 부자가 되었다.  집은 커도 그 집이 초가였던 것과, 방앗간 근처에 큰 기와집이 있었던 것을 생각하면 제1 부자는 아니었던 것 같다.  할아버지에게 고마운 생각은,  언제나 글 읽는 모습을 보여주었다는 것.  어버지, 어머니,  나머지 가족 누구도 보여주지 않은 모습이다.  글이란 대부분 주역 같은 내용이지만,  듣는 사람이야 이해할 수 없는 것인데, 종교로 말하자면 기도 같은 것이었다.

시계 보는 게 어려웠다.  신발 좌우측 구분하는 것도 어려웠다.  마당에서 고추벌레도 보았다.  (여긴 중소 도시로 이사 온 두번 째 집) 집 앞 길 건너 학교 앞 (장마 뒤) 배수로에 죽어있는 쥐를 거지가 주워먹는 것을 보았다.  지금의 2차선 도로폭인 비포장 도로 길 건너에 국민학교가 있어서 학교 다니느라 먼 길을 가지 않았다.  지금 생각하니, 학교 근처에 살았다는 것은 국민학생을 배려했던 것 같다.

일본 사람이 지은 것으로 보이는 건물 2층에 한약방이 있었는데 할아버지가 자주 놀러가는 곳이다.  용돈을 받은 기억은 없지만,  담배곽 아래 1원짜리 동전이 몇 개씩 들어있었다.  비행장이 들어서자 이 곳으로 이사를 왔다.  볏짚을 많이 쌓은 우차 위에 앉아 먼 이 곳까지 왔다.  할머니 가까이 간 기억이 없다.  세탁소 앞 땅바닥 위에 앉아 떡을 팔던 외할머니가 나를 외면하던 눈빛이 선명하다.  떡달라고 조를까봐 그랬을 것 같은데,  7년쯤 뒤에 도시의 어느 국민학교에 물 마시러 들어갔다 만난 외삼촌에게서도 같은 눈빛을 보았다.  그 때는 체육대회를 위해 아주머니들에게 배구를 가르치던 중이었다.

내가 보는 친척들은 내 속에도 반드시 있다.  나의 눈에는 '내'가 보이지 않아서 남을 쓰는 것이겠지만..  내가 그 때, 그 장소에 있었다면,  나는 뭐가 얼마나 달랐을까?  사람이 무엇을 따라 어디로 가고 있는 지는 아무도 모른다.  보이는 것은 다들 삿대질을 하고 있다는 것.  바로 나처럼 이렇게..






나는 왜 코페르니쿠스가, 뉴튼이, 베에토벤이 되지 못할까?  지금 이러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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