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dnesday, 5 October 2016

내가 바라는 집은
냉기, 열기를 피할 수 있고
수도, 전기도 없고
하루 근근히 식사 두 끼로 족하고
병들지 않게 공기 좋은 곳에서
사람 만나지 않고
우주와 끝 없는 이야기를 할 수 있으면 좋다.

내가 10년을 더 살아도 뒤에 전할 말이 따로 없으며
10년을 먼저 가도 아쉬울 게 없다.
불행도 행복이라 마취하면 스스로 도망칠 일 없으며
혼자 망연히 앉아, 바람처럼 스쳐가는, 시간이 흘러 가는 것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세상 살이 충분하다.
어쩌다 세상을 만났 듯이,  어쩌다 가고나면 내가 어디 있는 지 모른다.

사람은 사람을 만나면서 어려진다.
70을 살아도 사람과 싸우면서 일곱 살보다 클 수 없다.
천한 생, 자랑하면서 일곱 살에 벗어나지 못하고
외로움 타면서 그 일곱 살에서 평생을 머문다.
이성을 만나 애를 낳고 덫에 걸려 평생을 세상사는 이유도 모르고 허덕인다.

내 집은 어느 동굴이거나,  허름한 여인숙이거나,  숨이 멈출 순간에도 나를 감싸주는 어는 기차 안이거나,  내 머리 밖 저 우주 안이거나이다.
나는 한 평생 가난뱅이로 세상을 떠돌다,  결국엔 나 스스로 내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 지 모르게 된다.
지금 내가 아는 것은,  이 우주에 와서 나 자신을 만난 것이다.
내 몸과 정신은 항상 같이 움직이고 서로를 떠받들었다.
스스로 존중하는 모양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미신이었다.
나의 행동은 언제나 선행이었고 양심이었다.
그 것이 내 안에서 소용돌이치는 오류라는 것을 나는 모르고 산다.
우주를 읽기 시작하려면 나를 뛰어넘어야 한다.
나를 가장 어리석게 만드는 것은 나를 포기하지 못하는 바로 나 자신이다.

쓰러진 나무,  그 위를 기어가는 개미, 위협하 듯 스쳐가는 벌, 밤 하늘 멀리 끝 없이 불타는 한 쌍의 별,  모두 어느 누구도 이해 못하는 특별한 하모니이다.
생존은 강할 수록 지저분해진다.  그러나 약한 것은 늘 평화를 준다.
역사에 이름이 남는다고 떠들 일이 아니다.  그 앞으로의 기억은 앞으로 자신에게서는 모두 증발해버린다.  그리도 높이 쌓은 보물탑에 비하면 아주 짧은 순간에 끝이 난다.  역사가 아무리 지저귄다고 그 것을 감상할 자신은 연기처럼 사라졌다.

세상을 내 안과 내 밖으로 확실히 나누는 순간 나는 우주의 미아가 되었다.
나는 태어나면서 사람의 모습을 했지만, 그냥 오랑우탄이거나 돼지이거나 개이거나 닭이었다.  알량한 재산 빼앗기지 않으려고 밤을 지켜야 했다.  얕잡아보이지 않으려고 표독스러워져야 했다.  이렇게 스스로의 인생을 난장판을 만들면서 모든 시간을 거기에 쑤셔박아버렸다.  내 인생에 단 한번도 내게마저 존경스러운 나 자신은 없었다.  사람과 멀어지면서 나는 스스로와 이렇게 많은 이야기를 할 줄 몰랐다.  우주에는 너무나도 많은 잘 짜여진 스토리가 있다는 것을 몰랐다.  그것은 끝도 없는 이야기가 된다.

내 몸은 언젠가 우주로 흩어진다.  그 중 어느 원소가 다시 다른 어느 생명체의 몸 속에서 지낼 수는 있겠으나 이미 지금 같은 하나의 정신의 촛불을 밝히지는 못한다.  아무리 오랜 시간을 생각해도,  저 달은 왜 저기에 있고,  나는 왜 여기에 있는 지,  그 이유를 알지 못한다.  굳이 알아야 할 이유도 없지만,  몰라도 유쾌하지는 않다.  유쾌란, 나의 DNA 프로그램이 그 명제를 좇도록 설정되어 있어서 그 것을 따라가려 하는 품목 중의 하나이다.  아무리 질러대도 인생은 혼자 부르는 자신만의 노래 안에 머물고 있다.  오래 전부터 내 각질이나 손톱, 머리카락은 나로부터의 이별 연습을 해왔다.

나의 일부는, 나의 조각은 바람을 타고 새처럼 날거나,  소나기에 쓸려 서로 다시 만나거나 각기 다른 두 친구의 몸 속에 나누어 있을 수도 있을 것이다.  폐지나 빈 소주병처럼 다시 돌려 쓸 수도 있을 것이다.  공짜로 빌려쓰다 정중히 돌려주지는 못 했지만,  그 모든 조각들이 조용히 흘러가는 시간을 흥분하지 않고 영원히 지켜보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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