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ursday 20 October 2016

계꾼

세력이 뭉치면 좋은 뜻으로 뭉칠 수 없다.
좋은 뜻은 자유로워서 뭉쳐지지 않는다.  뭉친 이유보다 하고 싶은 일도 많다.  그래서 따로 바쁘다.
나쁜 뜻은 뭉칠 수록 커진다는 것을 안다.  잔인할 수록 수확도 더 많다.  홍해를 가르 듯, 구급차 길이 열리 듯, 알아서 길을 비켜주는 사람들이 나타난다.  비켜주는 사람은 알면서, 모르면서, 본능적으로 비켜난다.

한 때, 인사만 하면 코드 인사라고 난리 꾕가리(이젠 꽹과리라고 쓰지 말자.  모음 많다고 자랑하는 거야 뭐야?) 치던 때가 있었다.  정작 코드 인사를 하는 이 때는 전혀 그런 용어를 쓰지 않는다.  지금까지 연이어 계꾼인사를 해도 뭐라는 사람이 없다.  한 대학생이 담당 교수를 끌어내리고,  이젠 대학학장까지 쫓아냈다.  나는 내가 폐륜이라 이런 말을 못 쓰는데,  저 짓도 폐륜이다.

나도 권력의 속성은 잘 안다.  천안함, 세월호 그것도 킬링 필드와 다를 바 없다.  그러나,  내가 붙들고자 하는 권력 속에서 그런 일이 일어났다면?  나는 별 다른 수가 있었을까? 자문해본다.

1. 사드 문제를 놓고 나라면 어떤 고민을 했을까?
2. 내 후임자는 나와 같은 고민을 할까?  반대당에서 등극하면 지금과는 반대로 바뀌는 게 아닐까? (내가 찬성이면 저쪽은 반대, 내가 반대면 저쪽은 찬성)

권력이 뭉치는 과정은 눈이 뭉치는 과정과 비슷하다.  점점 사람들이 몰려들고 세금을 뜯어먹는다.  실력이 있어서 뭉치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고, 결합을 튼튼하게 하는 게 제일 중요하다.  내부적으로 축출되는 경우는 실적이 없어서가 아니라,  배신 센서에 노출되었을 때이다.

가난한 나라에서는 이런 과정을 거의 모든 곳에서 볼 수 있다.  세계 몇 번 째 부자라고 자화자찬하는 나라도 이러고 있다는 게 문제이긴 하다.   조금 고려할 사항이라면, 몽골, 중국, 일본, 기타 타국에 의해서 심각하게 정신적으로 피폐해진 국민 상태라는 정도.  미국의 정치를 보며 부럽다는 생각을 할 자격이 있는 지 스스로에게 물어본다.  없다.  노력 없이 나를 뺀 다른 국민 누군가가 해주길 바라고 있으니까..

강도를 막을 방법은 없다.  강도에게 '너 강도지?' 하면 깜짝 놀랠 것 같은가?  두 척의 배가 침몰했을 때 방어선이 생겼다.  접근 금지 구역이다.  사복 경찰이다.

대통령 권한을 인수했을 때,  한반도에 사는 모든 사람들 중 저와 똑 같은 환상을 안 보여줄 사람이 얼마나 될까?

하는 짓이 이상해도 어느 날 갑자기 좋아보이는 게 권력의 힘이다.  군중 심리는 그렇게 응용된다.  아무리 터무니 없는 정치쇼도 주변 사람에게 물어보면 관점도 관심도 다 다르다.  관심이 없다는 말은 힘에 굴복한다는 뜻이고, 나는 모르니 마음대로 해먹어라라는 뜻이 된다.  이 것은 선거 때 투표하세요.라는 말과도 차이가 있다.  후보자 모두가 강도라면 좀 덜한 강도를 찍을까?  우리 동네 강도를 찍을까?  거의 모두가 누가 뭘 할 사람인 지 모른다.  그냥 나와서 찍으라고 하니 투표장에 가서 아무나 찍고 온다.
관심이 있다는 말이 곧 정의로운 것도 아니다.  100% 제대로 알고 입 방정을 떠는 사람은 없으니까..  이 것은 독립운동 때와도 또 다르다.  독립운동 때는 하나의 목표만 있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다.  정치, 경제적으로 독립해야 하지만,  그럴 생각을 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리고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정치 맛을 알까?  나설까?..

정치 폭력을 뒤에서 보고 있자면 이런 생각이 든다.
1. 방어선의 확대
2. 미끼 방어

1은 과시용으로 많이 쓰인다.  삼청교육대, 5.18, 청남대, 아웅산, 칼기 폭파는 같은 카테고리 안에 든다.  드러내놓고 하는 과격한 폭력은 세수를 증폭하는데 크게 기여한다.  돈은 권력을 공고히 하는데 필수품이다.  법이 공정한 것 같아도 원래 목적은 통제이다.  그린 벨트 같은 것도 자연보호 개념이 있는 것 같지만,  일반 서민이 아무데나 집을 못 짓게하는 행동 제한 조치이다.  산림법, 농지법 때문에 서민은 작은 땅도 구입할 수 없다.  그것도 단체나 -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 권력은, 마음대로 그린벨트 해제도 가능하고 구입도 가능하고 전용도 가능하다.  전용 조차 않고 써도 되는 게 능력이다.

2는 언론 회피용으로 많이 쓰인다.  서해안 유출, 북한 뉴스, 빨갱이 지목이 같은 카테고리 안에 든다.  빨갱이 지목은 근거도 없으면서 상대의 장래를 심각하게 훼손하는데, 법으로도 규정도 하려 들지 않는다.  이 사회 특성 상 자격정지에 5년 '이상'의 징역감은 된다.  여자친구의 사진을 실수로라도 공개하는 것은 인격 살인이다.  사람들이 싸우는 재미로만 살아봐서 무엇이 심각한 지 파악도 못하고 있다.  여중생이 학교 학생에게 강간 당했다고 말하니 담임 여고사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네가 참아라.'  교육계에 아는 사람이 있어 이런 말들이 어떻게 가능한 지 생각해 보았다.  승진 때까지 평가에서 단 한 번도 1등을 놓쳐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 기간이 7년이었다.  그냥 학교 공화국인 것이다.  어심을 흐리지 마라, 충성에서 비껴나지 마라라는 소리.

폭력은 피해 대상이 있어야 빛난다.  빛난다는 말은 소문을 내달라는 말이 된다.  폭력배들이 문신을 하는 이유와 같다.  그래서 완전히 진압할 필요는 없다.  적당히 안 본 척하다보면 꼬투리 잡을 기회가 생기게된다.  피해자가 가족이 모이면 오가는 소리가 사납다.  소리만 빽빽지르는데,  어쩔 때는 분명히 프락치 같아보인다.  기자라면 직업 상 어쩔 수 없이 현장에 가야하지만,  일반인에게라면 권 할 일이 아니다.

유족들이 모여도 옳은 말만 하지는 않는다.  실수도 많다.  데이터도 없는데 억측은 많다.  실력 있는 사람이 나타나도 유족들에게 쫓겨나기도 쉽고 살해 협박도 받는다.  유족도 유족 중에 가짜가 있는 지 그 것도 알 수 없다.  좋은 뜻으로 자비로 갔던 사람들은 그 일로 남을 죽일 일이 없지만,  분노한 유족이나 골수 당원이나, 골수 당원인 유족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나는 사람의 이성을 높이 평가하지 않는다.  사람마다 자신에 대한 가치 평가의 높낮이가 같을 수 없으니, 어떻게 말해도 개인 판단이다.  내가 황세자라면 이런 말로 노닥거리지 않았을 것이다.  '정의'의 기원이 어디였을까를 생각해본다.  어린 개들도 남의 입에 들어간 음식은 빼앗지 않는다.  이 것은, 규칙이고 정의이다.  침팬치는 남의 입에 있는 바나나도 손가락 넣어서 빼앗는다.  이 것은 침팬치 사회에서 규정된 바 없을 것이다.  DNA를 분석해봐야 하겠지..  그 서열에는 이런 폭력이 패키지로 포함 돼 있다.

오늘 뉴스에 원숭이가 돌도끼를 만들었다는 내용이 있었다.  조작된 것 같지만, 평소에, 지구에서 사람이 멸종되면 다음에는 분명히 원숭이들이 지금 사람들이 하고 있는 모양 그대로 항공모함 타고 다니면서 세계2차대전도 하고 그럴 것이라 생각한다.

나는 누구를 탓하려고 이 짓을 하는 게 아니다.  못 배운 것도 서러운데,  나 같은 무식쟁이에게 한 소리 듣고 기분 좋을 사람이 있겠는가?  듣는다고 행동을 바꾸겠는가?  지식이 얕은 사람들에게선 이런 말이 자주 들려온다.
'해야 한다.'
어찌 하는 게 당연하다는 소리이다.  그래서, '말도 안 돼'라는 말도 유행이다.
이 세상 모든 게 우리의 작품이다.  다~ 우리가 만들었다.  문제는 내 DNA 안에도 그 게 들어있을 것이라는데 있다.  원래 폭력은 방어체계였지만 거꾸로 뒤집어서 공격용으로 쓰고 있다는 것.  당연하다는 말은,  시행될 때까지 조용히 지켜보겠다는 소리이기도 하다.  기다린다는 뜻이다.

농촌에 와서 살다보니 주변 사람들 심리가 다 파악이 된다.  궁금한 것?  많다.  왜 돈도 안 되는 농사를 지을까?  왜 모이면 남 흉을 볼까?  왜 pc를 사용할 생각도 못 하고 살까?  그런데,  내가 나를 보면서도 이해가 안 된다.  그러는 나는, 왜 이러고 살지?

나나 그 사람들이나 공통점은?  이해 안 한다는 것, 용서 안 한다는 것,  배려 안 한다는 것, 강도짓을 하기 전에 상대방에 대한 증오심을 끝까지 끌어올려둔다는 것.  상대방이 미워서 빼앗는 것 같이 이해되지만,  빼앗기 전 자기 부양 장치이다.  그래야 뇌가 나(내 몸)와 같은 행동을 하게 된다.  '설마 이렇게 까지 나빠서야?' 이런 말을 스스로 하지 못하게.. 수십년 지나도 시효도 없는 공격을 해도 무방한 상태가 된다.  또 달리 할 이야기도 없겠다..

이런 이상한 사상은 이 땅 어디에나 풍부하게 샘플이 널려있다.  누구나 몇분이면 채집할 수 있다.  자기는 아무 힘도 안 쓰고 서울 사람 시켜서 골치 아픈 사건 해결하려하는 (손 안 대고 코푸는) 농심이나 아무 노력도 않고 평화를 바라는 나나 뭐가 다른가?

군산 주민들이 쌀을 등에지고 먼 일본 배까지 가는 영상을 보았다.  집집마다 솥을 뒤지면서 쌀밥도 아닌 보리밥이 있는 지 조사한단다.  사람이 먹지 않는 뭘 밥 대신 줬다고 했는데 기억이 안 난다.  일제가 다 물러가고 남는 게 있었다.  행정이야 새로 만들면 되는데 굳이 일본 꼬붕들을 공무에 썼을까?  정치라는 것에 '수탈'이라는 것을 전수받기 위해서였다.

밥도 못 먹고 황군미를 나르는 상황에서는 어디에 정의가 있는가?
이렇게 말하는 이유:  순진한 자식들에게 헛바람 넣지 않는 게 좋다는 말.  정의는 교과목 상품으로만 존재하는 것이다.

아래에 집 한 채가 있다.  그 집 지붕이 우리 집 땅 높이에 있다.  현관문을 왜들 그렇게 험하게 닫는 지 이해가 안 된다.  한번은 여자가 김장을 하는 지 들어갔다 나왔다 하는데 한 100번을 그렇게 시끄럽게 문을 닫는다.  사이가 나쁘지도 않은데 어디 가나 이런 짓들을 한다.  이 심하게 문 닫는 것은 김제에서 조선족이 그랬다.  월급 안 주면 큰 일 날 줄 알아라는 협박성 소음이다.
가족 중의 한 사람이 서울에서 일을 했다.  이모부는 첩이 있었는데 월급도 주다 말다 했다.  돈이라고 받아서 가방 같은데 넣어두면 이모 가족들이 돌아가며 돈을 훔쳐간다.  이모도 급할 때 썼다고는 했지,  다시 넣어뒀다는 말은 없었다.  이 일로 집에 와서 '훔쳐가도 너무 많이 훔쳐간다.면서 울었다.  나이 계산을 잘 못해서 이모 큰 아이와 우리 집 형제 서열이 바뀌었다.  다 늙어 죽을 때가 되었는데,  미안하단 말이 없다.  지금 와서 어찌 하냐는 것이다.
옛날에는 우리 집이 부자여서, 친척들은 우리 집 신세를 많이 졌다.  이모부는 공산군에게 끌려가서 죽을 뻔한 것을 살려냈다.  그래도 고마운 것을 모른다.  시가 어찌 사람이냐는데,  시(이것)가 곧 사람이다.

우리 집안도 이 모양이고, 밖에 나가면 이 동네는 더 한심한데..  그럼, 말만하다 인생이 다 가버리는 것은 어디서 보상받나?

47억년 만에 지구라는 곳에서 서로 만나 정말 할 짓이 없어,  단 한 번 뿐이 인생을 이 짓으로 망쳐버리고 있다.  어떤 잘못도 누군가 용서해준다 해도,  그 습관이 변경이 안 된다.  되돌릴 수 없어 다시 또 그 짓을 하게된다.

산 좋고 물 좋고 인심 좋고..  세상에 이런 곳은 없다.  뉴질랜드에는 있으려나?




......
아, tag을 안 달면 보는 사람이 없겠구나..

나의 억측은 묻는다.  구의동에 뭐가 있기에,  사고를 내나?  가지 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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