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esday, 3 February 2015

비난의 도구

(다시 읽어보니, 단어의 나열들이 많다.  나는 이 것을 고칠 시간이 없다.  일단 단어만 나열한다.  나는 내 글이 복사 돼 돌아다니는 것을 싫어한다.  나는 법적인 추궁을 하지 않는다. 그 현생 법이라는 것 조사, 기소, 분석, 판정 과정 모두 천출이라 내 인정 속에 없다.  생명이라면 나는 그것을 추궁할 필요도 없고 추궁하고 싶지도 않다.  100년 안에 깊은 낙서만 남기고 사리질 것을 안다.  자중은 누구나 가져다 써도 되는 멋진 도구이다. 우리는 모두 잠깐 살았다고 믿는 존재 하루살이들이다.  가난한 기자가 내일을 걱정할 때는 그것(인용)은 예외로 하는 것도 에티켓.  그러나 인생에 매달리지 말기 바란다.  인생은 하루살이보다 나을 게 없다.  그러니 너의 인생의 배팅에 자신을 가질 것.  정기예금 이율? 2나 1이나 0과 품격이 같다.  이 숫자 이해 내공 아무나 못 가진다.  즉문즉답?  웃기는 소리,  이 우주가 인간의 단어로 설명 될 수 없는데, 어찌 1초로 설명이 되겠느냐?)

결론 항에 올 것을 미리 보여주기..
성은 우리가 매일 똥 한 숟갈씩 행복한 마음으로, 당연하게, 맛 있게 먹는 일.
(인간의 착각:  배설물은 모두 버리는 것이다?  모든 생명체는 배설물을 소유 영역의 증거로 그것을 남긴다.  이를테면 '개 똥'이다 = 이 지역은 어느 개 한 마리의 영역이다.)
(사람은 오해 많은 짐승이라 이렇게도 불필요한 설명 찌꺼기가 반드시 필요하다.  이것을 제스쳐라고들 말한다.)


성에 투자되는 에너지는 인생의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어쩌면 한 인생의 관심사가 온통 성 문제인 사람도 있다.  젊었을 때는 그것이 새로운 인생(후세)을 생산하는데 바쳐진다 해도(그것이 이렇게 모든 인생에 꼭 필요한가는 별 문제로 하고) 일정 시간이 지나고 나면 배설 작용 이외의 가치가 없다.

하지만, 청년기 이후 쓸모 없는 것이 성이라고 말 할 수는 없다.  비상약처럼 가끔 쓰일 목적이라면 탓할 수 없는 일이다.  기운을 계속 하강시키는 우울과는 다르게 성은 계속 상승시키는 마약 같은 효과가 있다.  이것도 중독이 있어서 오랜 시간 쉽게 떼어버리지 못한다.  따라서 스스로 제한적인 처방이 필요한 것이 성이다.  무제한으로 방출하면 소득은 없고 에너지와 재화를 낭비하는 주요한 항목이 이것이다.

흔히, 이러한 성이 상대방을 공격하는 주요 무기로 사용된다.  주요 사업 아이템으로도 성을 사용하기도 한다.  거의 모든 드라마, 영화, 소설, 예술 작품에 소스로 사용되는 것도 성이다.  노래 가사의 대부분, 스토리를 결합하는 접착제(장면을 결합시키고, 장면 전환시키는 소품)로도 쓰이고, 이 세상 어디서나 누구에게서나 발견되는 것이 이 성이라는 것이다.

사실, 인간으로 하여금 지구 전체를 점령하게 하는 에너지 공급원도 이 성의 기능이다.  이것이 있어 지구가 이처럼 활기를 띨 수 있었다.  하지만, 이것은 배후에 극심한 스트레스를 동반한다.  이성을 보고 가슴이 뛰는 것은 이 스트레스의 기능이 작용한 것이다.  스트레스는 전투 준비의 활성화 물질이다.  이것은 생사의 갈림길에서 개체를 살려내는 에너지를 품고 있다.  상대를 죽이는 에너지이기도 하지만, 개체 스스로를 살려내는 에너지이기도 하다.  지나치면 그 특성 그대로 자신을 해치기도 한다.

누구든지, 이 성으로부터 100% 청결, 순수할 수는 없다.  자신의 탄생과 존재도 모두 성의 결과물이다.  이 성은 논리적으로 구분하기도 성격을 명확히 구분하기도 어렵다.  자신의 성은 무한히 청결하고 아릅답지만, 타인의 성은 똑 같은 대상으로 생각해줄 배려는 없다.  어떻게 다루어야 할 지 모르는 이상한 대상이다.

그런데 이것을 사람들은 누군가를 망치는데 흔히 써먹는다.  이러한 비난이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아랍에서는 형제로부터 퇴출이나 살해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  진위와 상관 없이 소문이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정조라는 것은 이성의 직접적 상대방에게만 유효한 것인데, 제삼자가 이것으로 흥분하고 소문 창출을 멈추지 못하게 하는 것도 특이하다.  성은 개별적인 문제이다.  인간의 DNA의 너무나도 큰 부분을 차지하는 점도 인간의 어쩌지 못하는 오류이다.  지구에 사는 대부분의 생명체는 이 성의 호르몬 활동 시기를 제한하고 있다.  인간이 이 제한을 놓친 것은 심각한 오류이다.

이 성이 복합적으로 작용해서 역사라는 것을 만들어냈고, 수많은 도구를 만들도록 했고, 인간에게 그토록 많은 생각을 품게 했다.  사람이 고결해지려면, 이 성을 최대한 없애는 수양을 해야한다.  (수양? 이것은 배고픔을 품어야 한다.  존재는 보유한 '시간 화폐'를 넘겨주고 생산이라는 것을 얻는다.  이 생산이 생명을 유지하게 하는데, 수양은 이 생산이 정지된 상태이다.  다른 말로는 '쉼'이라는 표현도 있다.  왜 휴식과 명상이 요구되는 지 이것으로 알게 된다.)이것은 어쩌면 암보다 해로운 호르몬 작용이기도 하다.  자기 몸에 있는 것으로 그토록 자주 써왔던 것을 하룻만에 휴지통에 버리는 일이 쉽지는 않다.  대개 보물로 분류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

알고보면, 인간에게 이보다 무익한 것도 찾아보기 힘들다.  그러나 이것이 없으면 존재의 이유를 찾을 생각도 동시에 사라진다.  인간을 큰 풍선으로 만든 것은 바로 이 성이다.

사람은 산소로 숨을 쉰다.  우주의 모든 생명이 산소를 이용해서만 생명을 이어나갈 이유는 없다.  어떤 원소든지 깊이 들여다보면, 전자의 위상 배치의 차이만 발견된다.  즉, 어떤 원소든지 산소를 대신할 수 있다는 말이다.  지구에 많은 것이 수소와 산소다.  수소는 떠오르고 산소는 내려와 있어서 생명체가 접촉하기에 유리하다.  그래서 지구의 생명체가 이 많은 산소를 이용해서 생명을 유지하는 미케니즘을 발견한 것은 어쩌면 아주 당연한 코스이다.

어쨌든 이 모든 것의 바탕에는 이 세상에 전혀 존재하지 못하는 어떤 것이 있다.  존재하지 않는 이것이 이 모든 것, 이 우주의 바탕이다.

무얼까?

나는 이것이 없다고 판단한다.
나는 이렇게 말한다.
이것은 어디에도 없는 것이라고..
그리고 이것은 확실하게 없다.
무엇을 설명하기에 꼭 필요한 것이 이것이다.
이것 없으면 우주를 설명할 방법이 없다.

모든 우주는 '시간'이라고 하는 가상의 음모 위에 느끼고, 만지고, 보고, 음미하고, 명쾌하게 입증한 그 모든 것, 사악한 혼란 위에 웅크리고 앉은 혐오이다.

시간.

이 가공의 바탕 위에 모든 우주가 존재한다.
pc에서 말하는 virtual machine과 완전히 같은 기능이다.

(제목으로 알겠지만, 미완성..)
성은 자주 쓰면 똥만도 못하고, 딱 한번 쓰면 쓸만하다.  베토벤에게 이 질문 하고 싶다.  이 부분 플라톤의 국가론의 일부를 인정한다.




(이진아를 보면서 미안한 마음에 왜 이렇게 눈물이 날까?
케이티 킴과 이진아를 보고, 나를 미안하게 만들면서, 또 이렇게 아름다운 사람이 있을까?하고 생각하도록 한다.
케이티가 미국에 사는 것은 그나마 다행이다.  이진아는 노르웨이로 보내줬으면 좋겠다.  네덜란드는 말고...  이 글의 일부는 이진아 본인도 모르게 이진아가 기여했다.

백호라는 것을 생각하면 아시안으로 '섞임 거부'데 대한 미안함과 동시에 유럽인의 결함을 발견한다.  인정하면서도 슬프다.  선악도 취향도 아니다.  유럽 특성은 보존되었으면 좋기도 하다.  나와 다른 것도 좋은 것이다.)

(존재(인간)가 다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공해 호르몬을 생동감 넘치게 가득 품고 있는 존재는 별도 분류하는 게 잘못이 아니다.  '경제'라는 것도 모든 존재의 필수 채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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