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다.
몇 년에 한번 경험할까 말까하는 일이 있다.
어떤 특별한 연필, 그리고 또 어떤 특별한 공책 재질이 잘 만나면 글자가 예쁘게 써지는 경험. 연필로 공책을 쓸 때 세번 정도 경험했던 것 같다. 생각해보니 연필이 종이를 미끄러져가는 기분과 속도 때문인 것 같다.
평소 숙제를 차분히 못하는데, 그날 이상하게도 바느질 하시는 어머니 옆에서 느긋하게 숙제를 하고 있었다. 그때야 tv도 없던 때라 밤 늦은 시각에 숙제를 하면 여유가 생긴다. 학교를 파한 직후는 아이들 마음이 바빠진다. 숙제 빨리하고 놀러나가야 하므로.. 숙제를 빨리 해야 하는 이유는 또 있었다. 전등 불이 어두워, 볕이 있을 때 숙제를 마쳐야 한다.
다음 날 학교에 갔다. 담임이 여선생이었는데, 내가 한 숙제가 아니라고 우긴다. 끝까지 추궁하더니 벌을 세운다. 청소가 다 끝나고 아이들이 다 집으로 돌아간 뒤에도 나는 벌을 섰다. 그러니까 숙제하는데 걸린 시간보다 더 많은 시간을 벌을 받았고, 아이들 앞에서 망신을 당했다. 더구나 촌에서 온 사람이라고 아이들에게 놀림을 받던 때였다. 어떻게 하면 폭행과 진리값이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이르는 걸까? 어떻게 남의 일을 나 자신보다 더 잘 안다는 말일까?
이런 류의 선생은 그 후로도 아주아주 많이 만나게 된다. 몇 년이 지나고, 주말에 한번 학급 회의를 하는데 (내용은 없지만..), 개인마다 학급 회의록을 작성하는데, 그 때도 글이 예쁘게 써졌다. 사라지지 않은 채, 몸에 남은 벌독처럼 그 때의 마음의 상처는 그대로 남아있다.
농촌에서 올라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초라해 보여서였을까? 잘 나가던 집안, 옆에 공항 짓는다고 쫓겨나다시피 올라온 도시에서 처음 이런 경험을 했다. 이런 글을 보면 짐작하겠지만, 공항 탈출 후 3대 째인 나는 열정이, 잘 부러지는 싸구려 샤프 심 같다. 다음 해, 착한 남자 교사 담임을 만났다. 숙제도 대신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서였을까? 방학 숙제로 이젠 진짜, 대신 그려준 그림을 제출했다. 도저히 그림은 못 그리겠어서 남에게 부탁을 했다. 가난한 집안, 그림 도구 자체가 없었으니 어떻게 그리는 지도 몰랐었다. 그 방학 숙제로, 나는 학교 대표로 출전하게 되어, 어쩔 수 없이 (가난한 부모 피를 빨아먹는 심정으로) 거금 들여 크레파스라는 것을 구입했다. 숙제 잘못한 덕으로 손해를 많이 봤다. 어느 대학교 나무 그늘에서 그림을 그렸는데, 당연히 그림이 나올 리 없었다. 내가 남 뒤통수 때리고 있던 그 행위를 멈추지 못 했다. '저, 숙제 다른 사람이 해줬어요..'라고 말할 용기가 없었다. 대회 출전 추천이 자신감 없는 아이 기 살려주려는 배려였을까? 배신감이 들었을 거라는 생각에 미안했다. 그 뒤로도 영영 크레파스 쓸 일은 없었다.
저런 여교사를 만나면, 아이에겐 1년은 지옥 생활이 될 수 있다. 우리는 아무 잘못 없이 평생을 살아왔다고 자신 있게 말 할 수 있을까? 그런 사람을 다시는 안 만나면 좋겠지만, 이런 세월에 더 자주 만나게 된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났다. 미술 교사가 악한 사람이었다. 수업 때마다 특정 가게에서 미술 도구를 사오게 하였다. 방학이 되기 전 미술 숙제를 해야했다. 학교 교재로 나온 미술책을 되도록 많이 빌려서 읽어보았다. 동네에 다른 학교 다니는 사람이 많으면 미술책을 많이 모을 수 있다. 그 중 독창적이면서도 그리기 쉬운 피카소나 몬드리안 같은 것을 그대로 따라 그렸다. 미술 숙제는 안 할 수 없었다. 잔인하게 때리니까.. 전체 수업 중 미술 숙제가 차지하는 비중도 컸다. 베니어합판을 national geographic 로고처럼 자르고 테두리는 길에서 주워놨던 유리병에 든 녹색 물감으로 칠했다. 돈도 많이 들어갔지만, 나는 이제 뭔가를 시도한 것이다. copy라는 것을 말이다. 불유쾌한 경험의 시작이었다. 내 인생에 남의 인생이 끼어들 수록 나는 사라지고 만다. 내 그림은 교실 뒤에 걸렸다. 이상하게 생각된 것은? 미술 교사라는 사람이 그게 세계적으로 유명한 작품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여름 방학이 끝나고 와보니 그림은 사라지고 없었다. 아프리카의 물병처럼 생긴, 누비 문양 그림인데 몇일 작업을 하면 다시 찾을 볼 수는 있겠지? 교사도 사라지고, 그 때의 나도 사라진 지금, 이상한 감정을 나는 아직도 보유하고 있다. 선생님 이제 배부르십니까? 그 때의 교사는 이제는 나의 가장 불쌍한 자식처럼 모서리에 움츠리고 앉아 사라지지 않고 있다.
그 후로 몇년이 지나고, 나는 제도 숙제에 공을 들였다. 여덟 시간 공들이면 교과서를 사진 찍은 것처럼 숙제가 깨끗하게 잘 나온다. 점수도 많이 받지만, 하루 여덟 시간이면 이제 다른 공부는 할 수 없게된다. 그 시간에 다른 공부를 하면 평균점이 훨씬 높아진다. 내 평생 그림 감각은 발달했는 지 어떤 지는 모르지만, 지금, 그림에 관한 것은 그 어떤 것도 안 한다. 지금은 pc용 건축 설계 프로그램이 있어 그 때의 기법은 쓰일 일도 없다.
이사가 잦아 얼마 전에 처음으로 한번 Sweet Home 3D를 가구 배치용으로 써보기는 했다.
몇 년에 한번 경험할까 말까하는 일이 있다.
어떤 특별한 연필, 그리고 또 어떤 특별한 공책 재질이 잘 만나면 글자가 예쁘게 써지는 경험. 연필로 공책을 쓸 때 세번 정도 경험했던 것 같다. 생각해보니 연필이 종이를 미끄러져가는 기분과 속도 때문인 것 같다.
평소 숙제를 차분히 못하는데, 그날 이상하게도 바느질 하시는 어머니 옆에서 느긋하게 숙제를 하고 있었다. 그때야 tv도 없던 때라 밤 늦은 시각에 숙제를 하면 여유가 생긴다. 학교를 파한 직후는 아이들 마음이 바빠진다. 숙제 빨리하고 놀러나가야 하므로.. 숙제를 빨리 해야 하는 이유는 또 있었다. 전등 불이 어두워, 볕이 있을 때 숙제를 마쳐야 한다.
다음 날 학교에 갔다. 담임이 여선생이었는데, 내가 한 숙제가 아니라고 우긴다. 끝까지 추궁하더니 벌을 세운다. 청소가 다 끝나고 아이들이 다 집으로 돌아간 뒤에도 나는 벌을 섰다. 그러니까 숙제하는데 걸린 시간보다 더 많은 시간을 벌을 받았고, 아이들 앞에서 망신을 당했다. 더구나 촌에서 온 사람이라고 아이들에게 놀림을 받던 때였다. 어떻게 하면 폭행과 진리값이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이르는 걸까? 어떻게 남의 일을 나 자신보다 더 잘 안다는 말일까?
이런 류의 선생은 그 후로도 아주아주 많이 만나게 된다. 몇 년이 지나고, 주말에 한번 학급 회의를 하는데 (내용은 없지만..), 개인마다 학급 회의록을 작성하는데, 그 때도 글이 예쁘게 써졌다. 사라지지 않은 채, 몸에 남은 벌독처럼 그 때의 마음의 상처는 그대로 남아있다.
농촌에서 올라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초라해 보여서였을까? 잘 나가던 집안, 옆에 공항 짓는다고 쫓겨나다시피 올라온 도시에서 처음 이런 경험을 했다. 이런 글을 보면 짐작하겠지만, 공항 탈출 후 3대 째인 나는 열정이, 잘 부러지는 싸구려 샤프 심 같다. 다음 해, 착한 남자 교사 담임을 만났다. 숙제도 대신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서였을까? 방학 숙제로 이젠 진짜, 대신 그려준 그림을 제출했다. 도저히 그림은 못 그리겠어서 남에게 부탁을 했다. 가난한 집안, 그림 도구 자체가 없었으니 어떻게 그리는 지도 몰랐었다. 그 방학 숙제로, 나는 학교 대표로 출전하게 되어, 어쩔 수 없이 (가난한 부모 피를 빨아먹는 심정으로) 거금 들여 크레파스라는 것을 구입했다. 숙제 잘못한 덕으로 손해를 많이 봤다. 어느 대학교 나무 그늘에서 그림을 그렸는데, 당연히 그림이 나올 리 없었다. 내가 남 뒤통수 때리고 있던 그 행위를 멈추지 못 했다. '저, 숙제 다른 사람이 해줬어요..'라고 말할 용기가 없었다. 대회 출전 추천이 자신감 없는 아이 기 살려주려는 배려였을까? 배신감이 들었을 거라는 생각에 미안했다. 그 뒤로도 영영 크레파스 쓸 일은 없었다.
저런 여교사를 만나면, 아이에겐 1년은 지옥 생활이 될 수 있다. 우리는 아무 잘못 없이 평생을 살아왔다고 자신 있게 말 할 수 있을까? 그런 사람을 다시는 안 만나면 좋겠지만, 이런 세월에 더 자주 만나게 된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났다. 미술 교사가 악한 사람이었다. 수업 때마다 특정 가게에서 미술 도구를 사오게 하였다. 방학이 되기 전 미술 숙제를 해야했다. 학교 교재로 나온 미술책을 되도록 많이 빌려서 읽어보았다. 동네에 다른 학교 다니는 사람이 많으면 미술책을 많이 모을 수 있다. 그 중 독창적이면서도 그리기 쉬운 피카소나 몬드리안 같은 것을 그대로 따라 그렸다. 미술 숙제는 안 할 수 없었다. 잔인하게 때리니까.. 전체 수업 중 미술 숙제가 차지하는 비중도 컸다. 베니어합판을 national geographic 로고처럼 자르고 테두리는 길에서 주워놨던 유리병에 든 녹색 물감으로 칠했다. 돈도 많이 들어갔지만, 나는 이제 뭔가를 시도한 것이다. copy라는 것을 말이다. 불유쾌한 경험의 시작이었다. 내 인생에 남의 인생이 끼어들 수록 나는 사라지고 만다. 내 그림은 교실 뒤에 걸렸다. 이상하게 생각된 것은? 미술 교사라는 사람이 그게 세계적으로 유명한 작품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여름 방학이 끝나고 와보니 그림은 사라지고 없었다. 아프리카의 물병처럼 생긴, 누비 문양 그림인데 몇일 작업을 하면 다시 찾을 볼 수는 있겠지? 교사도 사라지고, 그 때의 나도 사라진 지금, 이상한 감정을 나는 아직도 보유하고 있다. 선생님 이제 배부르십니까? 그 때의 교사는 이제는 나의 가장 불쌍한 자식처럼 모서리에 움츠리고 앉아 사라지지 않고 있다.
그 후로 몇년이 지나고, 나는 제도 숙제에 공을 들였다. 여덟 시간 공들이면 교과서를 사진 찍은 것처럼 숙제가 깨끗하게 잘 나온다. 점수도 많이 받지만, 하루 여덟 시간이면 이제 다른 공부는 할 수 없게된다. 그 시간에 다른 공부를 하면 평균점이 훨씬 높아진다. 내 평생 그림 감각은 발달했는 지 어떤 지는 모르지만, 지금, 그림에 관한 것은 그 어떤 것도 안 한다. 지금은 pc용 건축 설계 프로그램이 있어 그 때의 기법은 쓰일 일도 없다.
이사가 잦아 얼마 전에 처음으로 한번 Sweet Home 3D를 가구 배치용으로 써보기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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