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누군가가 이 나라 모든 사람을 한 마디로 때려잡은 적이 있다.
미개인..
긍정도 부정도 할 수 없는 말이다.
그 덕분에 기업하는 사람, 정치하는 사람들의 국민에 대한 인식이 얼마나
심각한 수준인 지를 알게 되었다.
발언자에 대한 평가를 하려는 이유로 이 페이지가 할당되지는 않았다.
시간이 좀 흐른 뒤 나는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아! 나도 표현의 자유를 구속하고 있었구나..'
'또, 나를 너무 지나치게 남과 구분하는 습관도 있구나..'
그 누군가가 내 가족이었다면 나는 어떻게 감싸는 발언을 했을까?
내 자식이었다면 그렇게까지 삿대질을 할 수 있었을까?
거의 모든 죄수들에게도 면회는 있을 것이다.
그토록 지탄을 받는다면, 면회자가 거의 없어야 할 텐데, 그러지 않는다.
나는, 공동의 노력이 없다는 말을 하고 싶다.
공동체의 공동의 이익을 위해 뭘 하고 있었던가를 내게 묻고 있다.
앞 세대에 대해서 젊은 이들이 모르는 게 있다.
그들은, 일제의 전쟁을 대신 치뤄야 했다.
그 때의 습관이 지금도 남아 있다.
그 때까지의 한국의 농사에 비료, 농약이 없었다.
일본이 전쟁 물자를 빨리 조달하기 위해서 농사에 농약과 비료가 꼭 필요했던 것이고, 같은 이유로 대규모 간척지 공사, 댐 공사, 제방 공사, 산 중 연못들을 만들었던 것이다.
빠른 운반을 위해서 신작로도 필요했다.
남의 전쟁에 쓰라고 이 땅에서 전쟁물자를 만들어 일본에 바쳤다.
따로 공부할 시간도 없었고, 자식들을 훈육할 기회도 없었다.
일본의 명령을 이해하기 위해서 일본어를 모국어로 배워야 했다.
그래서 지금도 쉬지 못하고 작은 텃밭이라도 있으면, 농약과 비료로 농사를 짓는다.
땅들이 다 작아서, 지나가는 자동차 매연에도 어쩌지 못하고 농사를 짓는다.
쉬지 못하게 훈련 받아서, 쉬면 주변 눈치가 보인다.
지금도 그런다.
우리가 부지런해서 부지런한 게 아니다.
'빨리빨리'를 한국 문화로 잘못 아는 사람들이 있다.
일본 제국의 공출문화이다.
일본이 항복한 뒤로는 정치가 나라 전체를 망치기 시작했다.
아주 부자나 되어야 학교라는 걸 다닐 수 있었고
멀쩡한 옷이 없어 거지처럼 옷에 헝겁을 덧대어 입고 다니고, 떨어진 양말을 신고다니는 것은 흔히 볼 수 있는 일이었다.
동네 사람들이 다 그러고 사니, 그것이 흉이 아니었다.
그래서 벌어먹을 일도 막막한데, 우리끼리의 전쟁으로, 또 개인의 지적 성장을 다음 세대의 몫으로 포기해야 했다.
우리들 할머니는 그래서, 허리가 꼬부라지도록 일 하는 것 밖에 뭘 할 여유가 없다.
지금은 밥 할 때, 깨끗한 쌀을 사다 물로 씻어서 밥 솥에 넣어 버튼만 누르면 된다.
그 때는, 하루 밥 세번 하는 것만으로도 할머니의 하루 시간은 다 가버린다.
밥 하는 과정은 이렇다.
일단 절구에 넣고 쌀을 찧는다.
그러면 쌀과 쌀 껍질이 분리된다.
쌀을 키로 까불어서 쌀만 남게 한다.
이 쌀을 물로 씻고 복조리라는 것으로 돌을 골라내는데 이 것도 상당한 인내력이 필요하다.
산에서 나무를 해다가 부엌에서 연기를 다 마셔가며 밥하는 과정을 지켜보아야 한다.
반찬 만드는 과정도 대충 이렇다.
모든 반찬은 다 직접 농사를 지어야 했으므로, 텃밭에서 또는 근처 자기 밭에서 식료를 가져와야 한다. 집에서 하는 일년 농사에는 고추, 들깨, 참깨, 배추, 무.. 등 모든 농산물을 기르는 작업이 따른다. 소, 돼지, 닭, 토끼 같은 것도 일년 중 길러내야 한다.
즉, 지금처럼 어떤 것 하나 사다 먹는 것이 없다. 물론 가게라는 것도 없었고 있다고 해야 담배 가게 같은 초미니 가게 정도이다.
돈이 필요하면, 머리에 배추나 무 같은 채소를 이고, 10km고 20km고 장터가 있는 곳까지 걸어 가서 팔아온다. 쌀 같은 것을 머리에 이고 장거리를 다녀오는 생활이니 허리가 멀쩡한 할머니 보기가 어렵다. 산아 제한 같은 기술이 없어서 아이들은 저절로 늘어났다. 그래서 아이들이 적어도 한 집에 넷은 된다.
아이들도 반쯤은 한 살이 되기 전에 병으로 죽었다. 병원이라는 것도 주변에 없지만, 병원 입원이라는 것은 생각지도 못한다. 그냥 몇 일 앓다가 죽는 것 외에 부모가 어찔할 방법도 없던 세월이었다. 식량이 없어서 아이를 남의 집 머슴으로 보내는 일도 많았다. 아이를 살리는 다른 방법이라는 게 따로 없었던 것이다.
전쟁 고아도 많았지만, 자식을 먹일 방법이 없으니 아이를 홀트 아동복지 같은 데로 보낼 수 밖에 달리 방법이라는 게 없었다.
그래서 한국이 고아 수출 1위국이 된 것이다.
옷도 집에서 배틀에서 직접 만들어 입었는데, 품질이 좋지 않아서 오래 쓰지 못한다. 신도 잘 해야 고무신이었다. 그것도 바닥에 구멍이 나도록 신어야 한다. 운동화 같은 것은 아주아주 부잣집 아이들이나 신는 호화 사치품이었다.
방 두 칸 사이에 작은 구멍 하나를 뚤어서 거기에 5w짜리 전구 하나를 켰다. 전기세를 낼 돈이 있지 않았다. 다들 그리 살았다. 그것도 잠깐만 그렇게 썼다. 저녁내 그렇게 불 켜는 게 아니다. 식사할 때, 아이들 숙제할 때, 바느질 할 때.. 그 외는 불은 무조건 꺼야 한다.
벽은 그냥 흙벽으로 단열 시공이 안 돼 있어, 겨울이면 너무 추웠다. 방 안에 떠놓은 물이 얼기도 하니까..
매일 연탄 한장씩 사다 난방용으로 썼다.
명절 때면 집주인 댁에 선물을 해야 하는데, 지금으로서는 이해가 안 되겠지만, 계란 꾸러미라고 해서 짚으로 엮은 지푸라기 포장에 계란 열개가 고작이었다.
계란 열개가 명절날 선물이라는 것이다. 플라스틱, 비닐 같은 것은 구경도 할 수 없는 때였다. 아무리 먼 거리라도 걸어서 갔다. 그보다 좀 전에는 서울에서 지방까지 몇달씩 걸어서 다녔다. 그때 무슨 노선버스 같은 게 있었겠는가?
그래서, 아들 하나 공부 잘 하면, 이만한 보험이 없겠다 싶어 웬만큼 굶더라도 자식 공부는 시켜야 했다. 그것이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지금은 살만한데 말이다. 그것을 그만 두지 못하고 대학 시험 보러가는 자식을 따라 대학 정문까지 간다.
우리는 뭔가를 말 하기 전에, 싸우기 전에 이런 과정에 이런 결과와 어떻게 만나는 지를 알아둬야 한다. 사람은 침팬치보다 더 나을 것도 없고 다 고만고만한 고민을 하고 대충 살아간다.
나 자신도 남의 입장에서 보면 똑 같은 '남'이다.
얼마 전 뉴욕의 한 마트 주차장에서 벌어진 싸움을 봤다.
아이는 말리고, 부모는 한 여자를 눕혀놓고 계속해서 코를 주먹으로 내리치고 있었다.
나는 이 것을 보면서, 이 사람들 피가 수백년 뒤에 우리 피와 반드시 섞일 거라는 것을 안다.
우리가 인간 사회에 소속되어 사는 한, 이런 경력을 서로 얼마씩 교차해서 지니고 있다.
자세히 살펴보면, 타인과 나의 구분점이 애매해진다.
그리고 왜 남과 나를 구태여 구분하려고 하지?
왜 인간이 국경이라는 것을 만들어 국경 너머 사람들과 싸우고 있지?
왜 스스로를 국경 안에 가두고 그것을 애국이라고 말하는 거지?
인간은 이런 한심한 모순 속에서 공존하고 있다.
보지 않는 것도 믿고, 빤히 보고도 왜곡한다.
자기를 위해서는 좋은 것 따로 챙겨두고, 남에게는 함량 미달, 나쁜 것을 골라준다.
이게 우리의 참 모습이다.
우리는 하나도 스스로의 개선점을 찾으로 노력하지 않는다.
인간 스스로 수양하는데 100년으로도 부족한데, 어느 누가 그리 하고 있는가 말이다.
tv 앞에 앉아서 리모콘 깔짝거리며, '재미가 없네..' 하던 경험은 없는가?
우리는 살면서 왜 사는 지 모른다.
없어도 안 빼앗기는 것, 모르면 살짝 가져오는 것..
이런 것 말고 우리가 제대로 해내는 것은 없다.
어쨌든 그 할머니들이 이 나라를 지켜왔다.
그런데 한 젊은 이가 조상의 사당을 엎어버린 일이 발생한 것이다.
'미개인이라는 발언 하나로..'
그런데, 다들 이런 것 아나?
앞으로도 긴 세월 우리는 그 상태에 머물 수 밖에 없다는 것
우리는 우리의 땅조차 지킬 힘이 없다는 것..
우리의 역사 속에서 재능 있는 사람을 모함해서 늘 죽이고 있었고, 그런 재능을 반에서 반으로, 또 반으로 줄여나가는 작업을 했다.
그 것은 부지런히 우리가 답습하고 있다.
천년 넘도록 그리 하고 있다. 이미 나라가 반으로 갈렸는데, 또 그러려고 한다.
다들 우리를 지키지 못 할 거면서, '우리'라는 표현은 아주아주 많이 쓴다.
우리는 우리의 우리가 아니다.
우리는 표현의 자유 운운하기 전에, 누구를 탓하고 할 권리라는 게 없다.
우리의 전 세대는 다음 세대에게 생명을 연결해주기 위해 살아견뎌내는데 시간을 온통 쏟아왔다. 책을 볼 돈도 없었지만, 시간이 없었다.
저 발언에 교수들도 맞장구를 쳤는데, 저런 할머니보다 하나도 나을 것은 없다.
교수직은 그런 할머니들이 만들어낸 것을 할머니는 말 하지 않는다.
그런 사실 자체도 알지 못하니까..
스스로는 아무 것도 안 하면서, 일본을 욕하면 뭣 하나?
미국이나, 중국에 아부하면 나라를 공짜로 지켜준다던가?
신기한 일이 하나 있다. 기적 같은 일본의 성장을 한국은 배울 생각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한강의 기적이 기적이면? 미국과 맞붙은 일본의 기적은 기기기기적일까?
이 글은 자료가 부족하다. 글 잘 쓰는 사람이 이 내용을 정리해줘야 할 것 같다.
쓰다보니 더 쓰기가 귀찮아진다. 보람도 없고..
이 시간에 발을 씻는 일이 내게는 더 중요한 일이다.
미개인..
긍정도 부정도 할 수 없는 말이다.
그 덕분에 기업하는 사람, 정치하는 사람들의 국민에 대한 인식이 얼마나
심각한 수준인 지를 알게 되었다.
발언자에 대한 평가를 하려는 이유로 이 페이지가 할당되지는 않았다.
시간이 좀 흐른 뒤 나는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아! 나도 표현의 자유를 구속하고 있었구나..'
'또, 나를 너무 지나치게 남과 구분하는 습관도 있구나..'
그 누군가가 내 가족이었다면 나는 어떻게 감싸는 발언을 했을까?
내 자식이었다면 그렇게까지 삿대질을 할 수 있었을까?
거의 모든 죄수들에게도 면회는 있을 것이다.
그토록 지탄을 받는다면, 면회자가 거의 없어야 할 텐데, 그러지 않는다.
나는, 공동의 노력이 없다는 말을 하고 싶다.
공동체의 공동의 이익을 위해 뭘 하고 있었던가를 내게 묻고 있다.
앞 세대에 대해서 젊은 이들이 모르는 게 있다.
그들은, 일제의 전쟁을 대신 치뤄야 했다.
그 때의 습관이 지금도 남아 있다.
그 때까지의 한국의 농사에 비료, 농약이 없었다.
일본이 전쟁 물자를 빨리 조달하기 위해서 농사에 농약과 비료가 꼭 필요했던 것이고, 같은 이유로 대규모 간척지 공사, 댐 공사, 제방 공사, 산 중 연못들을 만들었던 것이다.
빠른 운반을 위해서 신작로도 필요했다.
남의 전쟁에 쓰라고 이 땅에서 전쟁물자를 만들어 일본에 바쳤다.
따로 공부할 시간도 없었고, 자식들을 훈육할 기회도 없었다.
일본의 명령을 이해하기 위해서 일본어를 모국어로 배워야 했다.
그래서 지금도 쉬지 못하고 작은 텃밭이라도 있으면, 농약과 비료로 농사를 짓는다.
땅들이 다 작아서, 지나가는 자동차 매연에도 어쩌지 못하고 농사를 짓는다.
쉬지 못하게 훈련 받아서, 쉬면 주변 눈치가 보인다.
지금도 그런다.
우리가 부지런해서 부지런한 게 아니다.
'빨리빨리'를 한국 문화로 잘못 아는 사람들이 있다.
일본 제국의 공출문화이다.
일본이 항복한 뒤로는 정치가 나라 전체를 망치기 시작했다.
아주 부자나 되어야 학교라는 걸 다닐 수 있었고
멀쩡한 옷이 없어 거지처럼 옷에 헝겁을 덧대어 입고 다니고, 떨어진 양말을 신고다니는 것은 흔히 볼 수 있는 일이었다.
동네 사람들이 다 그러고 사니, 그것이 흉이 아니었다.
그래서 벌어먹을 일도 막막한데, 우리끼리의 전쟁으로, 또 개인의 지적 성장을 다음 세대의 몫으로 포기해야 했다.
우리들 할머니는 그래서, 허리가 꼬부라지도록 일 하는 것 밖에 뭘 할 여유가 없다.
지금은 밥 할 때, 깨끗한 쌀을 사다 물로 씻어서 밥 솥에 넣어 버튼만 누르면 된다.
그 때는, 하루 밥 세번 하는 것만으로도 할머니의 하루 시간은 다 가버린다.
밥 하는 과정은 이렇다.
일단 절구에 넣고 쌀을 찧는다.
그러면 쌀과 쌀 껍질이 분리된다.
쌀을 키로 까불어서 쌀만 남게 한다.
이 쌀을 물로 씻고 복조리라는 것으로 돌을 골라내는데 이 것도 상당한 인내력이 필요하다.
산에서 나무를 해다가 부엌에서 연기를 다 마셔가며 밥하는 과정을 지켜보아야 한다.
반찬 만드는 과정도 대충 이렇다.
모든 반찬은 다 직접 농사를 지어야 했으므로, 텃밭에서 또는 근처 자기 밭에서 식료를 가져와야 한다. 집에서 하는 일년 농사에는 고추, 들깨, 참깨, 배추, 무.. 등 모든 농산물을 기르는 작업이 따른다. 소, 돼지, 닭, 토끼 같은 것도 일년 중 길러내야 한다.
즉, 지금처럼 어떤 것 하나 사다 먹는 것이 없다. 물론 가게라는 것도 없었고 있다고 해야 담배 가게 같은 초미니 가게 정도이다.
돈이 필요하면, 머리에 배추나 무 같은 채소를 이고, 10km고 20km고 장터가 있는 곳까지 걸어 가서 팔아온다. 쌀 같은 것을 머리에 이고 장거리를 다녀오는 생활이니 허리가 멀쩡한 할머니 보기가 어렵다. 산아 제한 같은 기술이 없어서 아이들은 저절로 늘어났다. 그래서 아이들이 적어도 한 집에 넷은 된다.
아이들도 반쯤은 한 살이 되기 전에 병으로 죽었다. 병원이라는 것도 주변에 없지만, 병원 입원이라는 것은 생각지도 못한다. 그냥 몇 일 앓다가 죽는 것 외에 부모가 어찔할 방법도 없던 세월이었다. 식량이 없어서 아이를 남의 집 머슴으로 보내는 일도 많았다. 아이를 살리는 다른 방법이라는 게 따로 없었던 것이다.
전쟁 고아도 많았지만, 자식을 먹일 방법이 없으니 아이를 홀트 아동복지 같은 데로 보낼 수 밖에 달리 방법이라는 게 없었다.
그래서 한국이 고아 수출 1위국이 된 것이다.
옷도 집에서 배틀에서 직접 만들어 입었는데, 품질이 좋지 않아서 오래 쓰지 못한다. 신도 잘 해야 고무신이었다. 그것도 바닥에 구멍이 나도록 신어야 한다. 운동화 같은 것은 아주아주 부잣집 아이들이나 신는 호화 사치품이었다.
방 두 칸 사이에 작은 구멍 하나를 뚤어서 거기에 5w짜리 전구 하나를 켰다. 전기세를 낼 돈이 있지 않았다. 다들 그리 살았다. 그것도 잠깐만 그렇게 썼다. 저녁내 그렇게 불 켜는 게 아니다. 식사할 때, 아이들 숙제할 때, 바느질 할 때.. 그 외는 불은 무조건 꺼야 한다.
벽은 그냥 흙벽으로 단열 시공이 안 돼 있어, 겨울이면 너무 추웠다. 방 안에 떠놓은 물이 얼기도 하니까..
매일 연탄 한장씩 사다 난방용으로 썼다.
명절 때면 집주인 댁에 선물을 해야 하는데, 지금으로서는 이해가 안 되겠지만, 계란 꾸러미라고 해서 짚으로 엮은 지푸라기 포장에 계란 열개가 고작이었다.
계란 열개가 명절날 선물이라는 것이다. 플라스틱, 비닐 같은 것은 구경도 할 수 없는 때였다. 아무리 먼 거리라도 걸어서 갔다. 그보다 좀 전에는 서울에서 지방까지 몇달씩 걸어서 다녔다. 그때 무슨 노선버스 같은 게 있었겠는가?
그래서, 아들 하나 공부 잘 하면, 이만한 보험이 없겠다 싶어 웬만큼 굶더라도 자식 공부는 시켜야 했다. 그것이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지금은 살만한데 말이다. 그것을 그만 두지 못하고 대학 시험 보러가는 자식을 따라 대학 정문까지 간다.
우리는 뭔가를 말 하기 전에, 싸우기 전에 이런 과정에 이런 결과와 어떻게 만나는 지를 알아둬야 한다. 사람은 침팬치보다 더 나을 것도 없고 다 고만고만한 고민을 하고 대충 살아간다.
나 자신도 남의 입장에서 보면 똑 같은 '남'이다.
얼마 전 뉴욕의 한 마트 주차장에서 벌어진 싸움을 봤다.
아이는 말리고, 부모는 한 여자를 눕혀놓고 계속해서 코를 주먹으로 내리치고 있었다.
나는 이 것을 보면서, 이 사람들 피가 수백년 뒤에 우리 피와 반드시 섞일 거라는 것을 안다.
우리가 인간 사회에 소속되어 사는 한, 이런 경력을 서로 얼마씩 교차해서 지니고 있다.
자세히 살펴보면, 타인과 나의 구분점이 애매해진다.
그리고 왜 남과 나를 구태여 구분하려고 하지?
왜 인간이 국경이라는 것을 만들어 국경 너머 사람들과 싸우고 있지?
왜 스스로를 국경 안에 가두고 그것을 애국이라고 말하는 거지?
인간은 이런 한심한 모순 속에서 공존하고 있다.
보지 않는 것도 믿고, 빤히 보고도 왜곡한다.
자기를 위해서는 좋은 것 따로 챙겨두고, 남에게는 함량 미달, 나쁜 것을 골라준다.
이게 우리의 참 모습이다.
우리는 하나도 스스로의 개선점을 찾으로 노력하지 않는다.
인간 스스로 수양하는데 100년으로도 부족한데, 어느 누가 그리 하고 있는가 말이다.
tv 앞에 앉아서 리모콘 깔짝거리며, '재미가 없네..' 하던 경험은 없는가?
우리는 살면서 왜 사는 지 모른다.
없어도 안 빼앗기는 것, 모르면 살짝 가져오는 것..
이런 것 말고 우리가 제대로 해내는 것은 없다.
어쨌든 그 할머니들이 이 나라를 지켜왔다.
그런데 한 젊은 이가 조상의 사당을 엎어버린 일이 발생한 것이다.
'미개인이라는 발언 하나로..'
그런데, 다들 이런 것 아나?
앞으로도 긴 세월 우리는 그 상태에 머물 수 밖에 없다는 것
우리는 우리의 땅조차 지킬 힘이 없다는 것..
우리의 역사 속에서 재능 있는 사람을 모함해서 늘 죽이고 있었고, 그런 재능을 반에서 반으로, 또 반으로 줄여나가는 작업을 했다.
그 것은 부지런히 우리가 답습하고 있다.
천년 넘도록 그리 하고 있다. 이미 나라가 반으로 갈렸는데, 또 그러려고 한다.
다들 우리를 지키지 못 할 거면서, '우리'라는 표현은 아주아주 많이 쓴다.
우리는 우리의 우리가 아니다.
우리는 표현의 자유 운운하기 전에, 누구를 탓하고 할 권리라는 게 없다.
우리의 전 세대는 다음 세대에게 생명을 연결해주기 위해 살아견뎌내는데 시간을 온통 쏟아왔다. 책을 볼 돈도 없었지만, 시간이 없었다.
저 발언에 교수들도 맞장구를 쳤는데, 저런 할머니보다 하나도 나을 것은 없다.
교수직은 그런 할머니들이 만들어낸 것을 할머니는 말 하지 않는다.
그런 사실 자체도 알지 못하니까..
스스로는 아무 것도 안 하면서, 일본을 욕하면 뭣 하나?
미국이나, 중국에 아부하면 나라를 공짜로 지켜준다던가?
신기한 일이 하나 있다. 기적 같은 일본의 성장을 한국은 배울 생각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한강의 기적이 기적이면? 미국과 맞붙은 일본의 기적은 기기기기적일까?
이 글은 자료가 부족하다. 글 잘 쓰는 사람이 이 내용을 정리해줘야 할 것 같다.
쓰다보니 더 쓰기가 귀찮아진다. 보람도 없고..
이 시간에 발을 씻는 일이 내게는 더 중요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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