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turday 21 May 2016

학교 교과목의 중심 사상은 '충'이다.
충성할 것 같으냐 아니냐를 묻고 싶은 것이다.

이 충이라는 것은 교묘히 효와 같이 쓰인다.  지금도 어느 '국민'학교에 가면 충, 효가 걸려있을 것이다.  충의 대상은 국가인 것처럼 보이게 함시 하지만,  충의 숨은 대상은 현 권력 기관이다.  그리고 효가 당연한 것처럼,  근거도 없이 '충'도 당연한 것처럼 보이게 한다.  단지 옆에 나란히 걸려있다는 것만으로..

나는 충의 근원을 '노화'에서 찾는다.  나이 들어가면서 유난히 충성에 갈증을 느낀다.  황제들도 그처럼 충성에 갈증을 느꼈을 것으로 보인다.  갈 수록 세상의 data에서는 이질감, 부족감만 느끼는 세대에서는 의심만 채워져간다.  의심을 해소하는 유일한 방법은 확인인데,  충의 행동대장은 '확인'이다.

역사의 기술도 그렇고,  뉴스 기사도 모두 그러한 방향을 벗어날 수 없다.
모두들 제대로 쓰인 건 지는 확인할 여력이 없고 그냥 그대로 성전처럼 외우고 또 자식들에게도 강요하고 있다.  이제는 국민 정서로 바뀌어 있기 때문이다.

한국 이야기를 이렇게 하면,  불편한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완전히 같은 판을 일본 얘기로 해보자.  일본이 다께시마를 일본 영토라는 문구를 일본 교과서에 넣었다.  그것은 일본에게 정치적, 경제적으로 큰 이익을 준다.  100년 후에 어떤 일이 벌어질까?  전쟁을 치르고서라도 찾아가려 할 것이다.  그럼,  차후에 있을 전쟁에 대비를 하지도 않고,  독도 문제를 언급도 못하고,  7광구처럼, 독도 가스를 사용하지도 못하는 지금 상황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100년쯤 지나서 가스들이 조용히 빠져나가 사라져주기를 기다리고 있단 말인가?

기업의 입사 시험에도 같은 것을 묻는다.
학교의 그 시험 과목을 그대로 빌려다 쓰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공산주의 같은 전체주의의 발전을 지켜보면 금방 알 수 있 듯이,  충은 누군가 위에서 지시하는 바에 따라 기계처럼 따라하는 것을 말한다.  1:1 완전 계약 관계가 아니다.  완전 계약 관계란,  회사에 기여를 하고,  그에 상응하는 보수를 받는다는 말이다.  그런데 주변에서 그런 관계를 본 적이 있는가?

마트에 가서도 진짠가?  가짠가?를 생각하면서 눈치보면서 사야하고,  남의 집 세들어 살면서도 마치 하인 부리 듯하는 주인장의 눈치를 보아야 하고,  회사에 나가면?  사장님 눈치를 보면서 사는 세상에서 살고 있는 것 아니었던가?

단 돈 1원이라도 나에게 주는 사람에게는,  감사의 표시를 해야한다고 본다.  비정규직 사회를 어떻게 건전 사회라고 할 수 있겠나?

학생은 학교에 이유 없이 가고,  이유 없이 외운다.  취직 시험에 필요한 과목이라서 그렇긴 하지만,  별달리 할 일이 없어 다니는 게 학교이다.  그리고 그 시간이 아까웠던 건 지,  외우고 있던 것은 모두 진리가 된다.  그 어느 나라도 자기 나라 역사를 있는 그대로 쓰지는 못한다.  일단 쓰인 것은 모두 진리가 된다.  이런 심각한 오류를 수정하려는 의지가 없는 국민이라 항상 도륙을 당하고도 도움 받을 곳이 없다.  스스로 돕지 않기 때문이다.

미국이 왜 그렇게 쎄졌나를 생각해보면,  애정은 있어도,  충은 빨리 버려야 한다.  일본이 영국에게서 못 배운 것은 '없는 충'이다.


......
국민학교를 일본말이라고 하는 것 같던데,  한국이 미워서 일본이 일부러 쓰는 말인가?  일본 사람이 차를 타고 다니면?  일본 사람들이 농사를 지으면?  일본 사람들이 밥을 세 끼 먹으면?  다 일본식이던가?  쿠테타는 뭐든 지 틀렸다고 지적하면서 정권을 잡는다.  정권이 안정화 되면 이제는 자기가 하는 일이 옳고, 구태는 아니라고 말한다.  '히잡 옹호론은 그러한 의미가 있다.  겨우 꺼내잡은 카드가 '개혁'이지만,  지금은 친구를 돕고 국민을 핍박하는 용어로 쓰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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